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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그룹이 시작 한 삼성상회 터와 호암 이병철 고택(이건희 생가터)

여행/Landmark

by MasterHwan[마스터환] 2023. 5. 8.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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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마스터환입니다. 이젠 전 세계가 아는 삼성은 대구에서 시작 하였습니다. 대구의 중심 동성로 인근, 달성공원과 서문시장 인근에 위치한 삼성상회 엣터와 삼성상회 옛터에서 오토바이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삼성 창업주이자 초대회장 호암 이병철 고택이자 삼성전자 회장겸 삼성그룹 총수 였던 이건희 생가터가 있습니다.

 

삼성 그룹이 시작 한 삼성상회 터와 호암 이병철 고택(이건희 생가터)

삼성그룹이 시작한 삼성상회 터

 

삼성상회 터는 대구 지하철 3호선 달성공원역 4번 출구에서 도보로 3분거리 도로변에 있습니다

 

삼성상회 터는 삼성그룹의 전신인 삼성상회가 시작된 곳입니다. 삼성상회가 삼성물산, CJ 제일제당으로 변천하면서 현 건물은 그대로 빈 건물로 자리 잡았습니다. 재벌의 발원지이자 중요 근대 유적지인 중요 유산을 현재는 대구시가 보존 관리 하고 있습니다. 건물의 노후화로 1997년 철거 후 삼성상회 터라는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건물 맨 앞에 2D 삼성상회 터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삼성그룹이 시작한 삼성상회 터

삼성을 키운 대구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삼성이 시작한 곳은 대구입니다. 삼성의 탄생지인 것은 물론 삼성이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 잡는데 중추적 역할을 한 도시도 대구 입니다. '삼성을 키운 도시 = 대구' 라는 명제가 성립합니다. 삼성의 발상지가 대구라는 사실은 보존하고 발전시킬 분명한 가지가 있습니다. 삼성의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 있는 옛 제일모직 부지에 들어선 대구창조경제단지를 통해 대구와 삼성은 더욱 큰 비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삼성그룹이 시작한 삼성상회 터

삼성상회 터 주변에는 삼성과 관련된 다양한 안내판이 있습니다.

 

삼성의 발원지 삼성상회 터

대구시 인교동 61-1번지, 삼성의 모태인 삼성상회의 옛터입니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역사는 이곳에 세워진 작은 목조건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삼성상회를 설립한 1938년은 삼성의 원년이 되었으며 이렇게 유래한 '삼성'이란 이름은 영원할 것입니다.

 

아름드리 나무도 가느다란 뿌리로부터 생명을 얻고 거대한 물주기도 작은 샘에서 출발하듯 세계를 향한 삼성의 꿈이 이 곳에서 발원하였기에 삼성은 여기에 삼성상회 기념의 자리를 마련하고 언제나 그 초심을 기억하겠습니다.

 

2011년 6월

삼성상회 목조 건물(지하 1층, 지상4층) 모형

상업활동의 중심지, 서문시장

삼성상회를 설립하기 전, 호암 이병철(1910 ~ 1987) 회장은 사업구상을 위해 수개월에 걸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국내 여러 도시와 만주, 북경, 상해 등지를 돌아본 끝에 소자본으로도 승부를 걸 수 있는 무역업을 선택하고 1938년 3월 1일 대구 상업활동의 중심지였던 서문시장 한 편에 '주식회사삼성상회'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당시 대구 서문시장은 경부선 철도와 여러 국도를 통해 북쪽으로는 안동, 의성, 김천, 상주,   남쪽으로는 현풍, 고령  서쪽으로는 성주까지 연결되어 각종 생필품과 농, 수산물, 포목, 가축 등이 활발히 거래되는 상업의 중심지 였습니다.

 

광복 후 삼성물산공사로 발전하여 서울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약 9년간 삼성상회는 서문시장의 좋은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지금의 삼성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좌) 삼성의 발원지 삼성상회 터 (우) 상업활동의 중심지, 서문시장

삼성상회의 풍경

삼성상회 건물 1층의 오른쪽에는 모터실과 함께 제분기, 제면기가, 왼쪽에는 응접실과 온돌방,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건물 뒤쪽에는 밀가루와 국수를 쌓아 놓은 창고가 있었고 2, 3, 4층은 국수 건조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전화기 한 대와 40여명의 종업원으로 출발한 삼성상회는 대구 근교의 청과물과 동해안의 건어물 등을 모아 만주와 북경 등지로 수출하였습니다. 또한 제분기와 제면기를 갖추고 국수 제조업도 병행하였는데 삼성상회에서 생산한 별표국수는 인기가 높아 국수를 구입하기 위해 도소매상들이 끌고 온 짐 자전거와 소달구지 등으로 건물 앞은 언제나 북적 거렸습니다

 

호암은 가족과 함께 이 건물의 한 편에서 한동안 곁방살이를 했습니다. 삼성상회가 거둬들인 이익을 살림집 장만에 쓰는 대신 고스란히 재투자했기 때문입니다.

1997년 7월 삼성상회 모습

삼성,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

삼성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회장은 크고, 많고, 강하며, 완전한 존재를 나타내는 숫자 삼에 밝고, 높고, 깨끗이, 그리고 영원히 빛난다는 의미인 성을 합쳐 '삼성'이라 하고, 여기에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그 후에도 호암은 새로운 회사를 설릴할 때 '제일'이나 '중앙'과 같은 이름을 붙여 최고를 지향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의지를 반영하였습니다.

(좌) 삼성상회의 풍경  (우) 삼성,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

사업보국의 태동

1945년 광복 직후, 호암은 이곳 삼성상회에서 기업가의 임무를 새롭게 깨달으며, 삼성의 경영이념인 '사업보국' 정신을 확고히 세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기업을 인생의 전부로 살아왔고, 나의 갈 길이 사업보국에 있다는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

- 1976년 11월 이병철 회장의 '나의 경영론'(전경련 회보) 에서

 

1910년 한일합병의 해에 태어나 성장한 호암은 그의 신념대로 전 생애에 걸쳐 사업을 통한 조국의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삼성상회 터 앞을 지나는 대구 지하철 3호선

건축사적 가치

1934년 상업용 목조건물로 지어진 삼성상회는 지하 1층, 지상 4층에 건물 높이는 13m로 좌판이 대부분이었던 서문시장에서 단연 눈에 띄는 현대식 건물이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벽돌, 콘크리트를 이용한 서양식 건축기법이 유행했던 것과 비교할 때 삼성상회는 한옥의 재래기법과 목구조 기법이 혼합된 과도기적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격변하는 현대사 속에서도 60여 년간 건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해 온 삼성상회는 건축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 받고 있었지만, 건물 노후화에 따른 붕괴 위험 진단을 받고 1997년 9월에 해체되었습니다.

 

그 대신, 삼성상회가 있었던 자리에 기념 조형물을 설치하여 당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좌) 사업보국 의 태동 (우) 건축사적 가치

 

삼성 창업주이자 초대회장 호암 이병철 고택이자 삼성전자 회장겸 삼성그룹 총수 였던 이건희 생가터

 

삼성 창업주이자 초대회장 호암 이병철 고택이자 삼성전자 회장겸 삼성그룹 총수 였던 이건희 생가터는 삼성 그룹이 시작 한 삼성상회 터에서 오토바이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도보로 4분거리에 있습니다

삼성상회터에서 호암 이병철 고택 까지 도보 경로

호암 이병철 고택 (대구 중구 서성로 15길 61(인교동))

이 고택은 고 이병철 선생이 살았던 곳으로 광복 이후 1940년대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주택으로 한식목구조로 지어졌습니다. 기와와 지붕구조의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서까래 등의 목재 상태도 양호한 편 입니다. 호암 이병철 선생(1910 ~ 1987)은 결혼 후 대구로 분가 하면서 가족과 함께 이 주택에 거주 하였고, 선생의 셋째 아들인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선생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에서 이찬우, 권재림 부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1926년 16살 나이에 박두을 여사와 혼인했습니다. 1916년 6살이 되던 해부터 서당에서 유학 경전을 배웠고,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서울수송보통학교, 서울중동학교를 거치며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1930년에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1938년 3월 22일 대구시 중구 인교동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창업하였습니다. 삼성상회는 대구 특산품인 능금(사과) 유통업과 동해의 건어물을 중국과 만주 등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했고, 이 외에도 '별표국수'를 제조하여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삼성의 삼은 크고 많고 강함을, 성은 밝고 높고 영원히 빛남을 뜻합니다. 선생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를 경영 철학으로 삼아 한국 경제가 발전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문화, 예술, 교육, 언론 등 사회의 각 분야의 발전에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삼성상회는 오늘날 세계적인 일류기업이된 삼성그룹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삼성 창업주이자 초대회장 호암 이병철 고택이자 삼성전자 회장겸 삼성그룹 총수 였던 이건희 생가터

이건희 생가터 (대구 중구 서성로 15길 61(인교동))

이 고택은 1942년 1월 9일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병철 선생의 3남 5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난 집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 이병철 선생의 뜻에 따라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본 유학생활을 시작했고, 고학년 때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등을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를 졸업하였습니다. 1966년 10월 동양방송에 입사한 후 삼성물산 부회장, 삼성그룹 부회장 등을 거쳤으며, 1987년 12월 삼성그룹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1988년 삼성은 '제2창업'을 선선하며 인간 중심, 기술 중심, 자율 경영, 사회 공헌을 경영의 축으로 삼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21세기 그룹의 비전으로 삼았고, 1993년에는 획기적인 혁신으로 '신경영'을 추진함으로써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내 아버지 이병철 선생과 함께 한국의 반도체 사업을 일으킨 주역이 되었습니다.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입원하여 6년 5개월간의 투병생활 끝에 2020년 10월 25일 향년 78세로 별세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삼성 그룹이 시작 한 삼성상회 터와 호암 이병철 고택(이건희 생가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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