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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읍성 둘레길과 북장대

여행/Landmark

by MasterHwan[마스터환] 2015. 9. 23.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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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일자 : 2011. 10. 08    


동래 읍성을 돌다 정상에 가니 북장대와 동래 읍성지에 대한 안내문이 나왔다.
북장대 안내문도 아니고 동래 읍성지 안내문이 정상대에 있을 줄은...

동래 읍성지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호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음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인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후 동래에는 독로국 등으로 불린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는 1021년(현종 12)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에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 1관문이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음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가 송상현을 위시한 군, 관, 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년(영조7)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가 큰 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 때의 성이 지금 흔적이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서남북문과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지회루, 서문을 심성루, 남뭄을 무루, 암문을 은일루 라고 한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3문에도 옹성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 시대에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 여장 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아래는 북장대 ~~ 북장대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부산 시내가 한눈에 들어 왔다

아래는 북장대에서 바라본 온천장 주변

북장대에서 바라본 사직동 쪽 ~ 저 멀리 월드컵 경기장이

북장대 정면에는 망원경두 있었다. 처음엔 돈 넣고 구경 하는 건줄 알았는데 ~~ 무료 였다

망원경으로 보니 저 멀리 광안대교도 눈에 들어 왔다. 여기서 광안 대교가 눈에 들어 올줄은 상상도 안했는데

북장대에서 바라본 복천동 고분군 야외 전시관

어느 정도 구경하다가 다시 하산....
다음에 여기 야경 보러 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장대에서 내려 오다 보니 돌 탑이

북장대에서 어느 정도 내려 오니 다시 나타난 동래 읍성 성곽

저 멀리 동래 읍성 역사 축제 현장이 보이는게 이제 거의 다 내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눈 앞에 보이는 동래 읍성 전투 재현을 보고 출발 했던곳 

동래 읍성 내에 있는 장영실 과학공원

동래 읍성 역사 전투를 재현 했던 곳 

동래 읍성 성곽길

 

동래 읍성 역사 축제 기간 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다음에 사람이 적은 저녁에 다시 한번 와서 야경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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