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대구 수성구에 위치한 섬유전시관이 따로 존재하는 국립 대구 박물관

여행/박물관

by MasterHwan[마스터환] 2014. 9. 20. 13:10

본문

방문일자 : 2014. 01. 18               

 

이번에 방문한 곳은 경북고등학교 맞은편에 있던 국립대구박물관
대구 박물관의 특색이라면 대구가 섬유로 유명해서 인지 섬유 관련 전시관이 따로 있었다
그리고 상설 전시관은 2개가 있었는데  한 군데는 선사시대 부터 삼국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려시대, 조선시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침 방문햇을때 분청사기 주제로 기획전시실에서 특별 전시를 하고 있었다.

유명 맛집 음식을 집에서... 아신미디어

붉은간토기

붉은 간토기는 철분성이 들어있는 고운 진흙으로 그릇을 빚고 겉면에 산화철을 발라 문지른 뒤 구워 붉게 만든 토기이다. 이 토기는 평안도 지역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원래는 중국채색 토기의 영향을 받아 함경도 지역에서 먼저 만들어진 것이 남쪽으로 퍼졌다고 추정된다. 남한에서는 주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많이 발견되어 껴묻거리 같은 특수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었다고 생각되었으나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및 금릉 송죽리의 집터에서도 여러 형태의 붉은 간토기가 나와 실생활에서도 사용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토기의 모양은 대체로 짧은 목을 가진 단지이나 집터에서는 단지외에도 바리, 잔, 굽다라접시, 항아리 등 실용토기들이 다양하게 출토되고 있다.  

 

대릉옥, 비취옥(좌) 그리고 목걸이(우) 

 

청동기 시대 사용된 절굿공이

나무는 부드럽고 흔하여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에 좋은 재료이지만 쉽게 썩기 때문에 나무로 만든 물건은 오랫동안 남아있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하지만 물 속이나 습지에 묻혀 산소와 미생물로부터 차단되면 더 이상 썩지 않는다. 습지를 지닌 안동 저전리유적과 대구 매천동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목제 농기구와 벌목용 도끼자루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볍씨를 찧어 쌀을 얻는 절굿공이는 벼농사가 정착된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농기구 라고 한다 

큰항아리

큰항아리는 청동기시대 전부터 사용 되었고 대부분 주거지에서 출토되고 있어 처음에는 음식물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 된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삼국시대부터 유아의 독무덤으로 사용 되면서 무덤에서 발견되는 예가 많다. 삼국시대 큰항아리는 높이가 1m, 무게는 50kg정도로 대형화 된다. 토기가마에서 굽히기 전 흙으로 빚었을때에는 훨씬 무더 무거웠을것이다. 큰항아리 는 크기가 워낙커서 온전한 상태로 발굴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고분의 부곽에서 대부분 출토되며, 분묘의 규모에 따라 적게는 2점, 많게는 8~9점 정도가 한 부곽 내에서 발견 된다. 큰항아리 안에는 쌀 등의 곡물이나 술 등의 음료를 저장하고 이러한 식료품을 담아 무덤에 부장하였다. 봉토 주구나 봉문의 주위에 깨뜨려서 놓아두는 경우도 있어 봉분 축조과정이나 축조 후에 행해지는 제사유물로 추정 되기도 한다. 6세기 이후 분묘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무덤 내에서 부장하는 경우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

 

영남지방의 초기철기시대 토기

기원전 1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토기제각 기술이 도입되면서 민무늬토기 제작기법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물레가 사용되기 시작하여 그릇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지붕 있는 가마 사용으로 토기 굽는 온도가 높아지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영남지방 초기철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로는 덧띠토기와 목긴 감은간토기가 있다. 이 가운데 덧띠토기는 한반도 중남부 이남 지역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민무늬토기이기도 하다. 토기의 아가리 부분에 점토띠를 덧붙인 토기로 점토띠의 단면 형태가 처음에는 원형이고 점차 삼각형으로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 굽다리 접시와 시루도 제작 사용되었다. 

 

황동 3년이 새겨진 쇠북

 

쇠북

쇠북은 청동으로 만든 북으로 절에서 처마 밑이나 간단한 걸이에 걸어두고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때 사용 되었다. 

 

마패

암행어사를 비롯한 관리들의 지방 출장 때에 역에서 말을 징발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신표로 한쪽 면에는 자호와 연월일을 새기고 다른 한쪽에는 말을 새겼다.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는 징발할 수 있는 말의 수를 나타내며 품계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호패

조선시대 인구수를 파악하고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호패법에 따라 16세 이상의 남자들은 누구나 호패를 차고 다녀야 했다. 호패는 신분에 따라 기재 내용과 재질이 달랐는데, 생원이나 진사의 경우는 황양목을 재료로 하여 이름, 출생 연도, 생원, 진사가 된 연도를 기재 하였다.

 

실내 전시관을 다 둘러보고 야외 전시관으로 향했다. 야회 전시관에는 토기가마 복원전시실과 돌방무덤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