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해운대 역사를 알 수 있는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 내에 있는 해운대구 역사관

여행/박물관

by MasterHwan[마스터환] 2022. 11. 6. 02:52

본문

안녕하세요! 마스터환입니다. 얼마전 해운대 문인협회 문학기획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에 다녀왔습니다.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에 도착하니 1층에는 해운대구 역사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미나 시간까지는 시간이 넉넉하게 남아서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 1층에 있는 해운대구 역사관을 방문했습니다. 해운대구 역사관에서는 해운대구 역사를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해운대 역사를 알 수 있는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 내에 있는 해운대구 역사관

 

해운대구 역사와 문화

 

해운대구는 후기 구석기시대(B.C. 20,000 ~ B.C. 15,000년 전후)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합니다. 좌동, 중동의 구석기 유족은 석기 제작과 관련된 망치돌, 모루롤 등이 다수 출토되어 당시 해운대 지역에서 생활했던 구석기인들이 석기 등을 제작했던 야외 생활유적이었떤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반여동 유적의 주거지에서는 토기 주둥이에 구멍이나 짧은 선을 그어 장식한 토기, 화살촉, 돌칼, 돌창, 돌도끼, 돌끌, 가락바퀴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생활상과 문화를 잘 보여줍니다. 이후 삼한, 삼국시대 ~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해운대구의 역사와 문화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동래도호부에 소속되었던 해운대 지역은 빼어난 자연경관을 가져 유력 사대부들이 즐겨 찾던 주요 관과지였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왜적에 항거하다 순절한 창의공신을 배툴한 절의의 고장이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5대에 걸쳐 5명의 효자와 1명의 효보를 배출하여 효의 정신을 실천하며 타 지역의 귀감이 된 효열의 고장이기도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부산부 수영출장소에 편입되었던 해운대구는 해방 이후 부산시 해운대출장소와 동래구 해운대출장소를 거쳐 1980년 해운대구로 승격되었습니다.

1988년 5월 자치구로 전환되었으며 2005년 컨벤션, 영상, 해양레저특구로 지정되면서 국제 관광도시로서 날로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습니다

 

해운대 연대표

 

1. 구석기시대 (B.C. 20,000 년 ~ B.C. 15,000년)

- 부산 해운대에 처음으로 사람이 거주

- 수렵과 채집생활 찍개, 긁개, 망치돌, 돌날 등 각종 석기 출토

- 좌동 유적, 중동 유적, 청사포 유적

구석기 유물(좌, 가운데) 및 구석기 유적(우)

2. 신석기시대 (B.C 10,000년 ~ B.C. 2,000년)

-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

- 패총 출현, 빗살무늬토기 사용, 일본과 교류

- 동삼동 패총, 범방 패총, 영선동 패총

 

3. 청동기시대 (B.C 1,500년 ~ B.C 300년)

- 벼농사 시작, 대규모 마을 형성, 고인돌 축조

- 청동기, 마제석기, 무문토기 사용

- 반여동 유적, 노포동 유적, 온천동 유적, 가동 유적, 감천동 고인돌

청동기 유적(좌) 및 청동기 유물(우)
유명 맛집 음식을 집에서... 아신미디어

4. 삼한시대 (B.C 300년 ~ 300년)

- 부산에서 독로국이 출현

- 와질토기와 각종 철기 사용, 목관묘 출현

- 구서동 유적, 노포동 유적, 온천동 유적, 동래 패총

 

5. 삼국시대 (300년 ~ 600년)

- 부산지역이 금관가야로 편입

- 대형고분의 출현, 각종 철기 발달, 도질토기 사용

- 반여동 고분, 좌동 고분, 복천동 고분, 연산동 고분, 청강리 유적

삼국시대 유물

6. 통일신라 ( 668년 ~ 936년)

- 불교문화 발전

- 최치원선생이 해운대 방문

- 해운대 천년석각, 동래고읍성지, 범어사, 덕천동 고분

최치원 선생(?) 동상

7. 고려시대 (918년 ~ 1392년)

- 정서가 정과정곡 지음

- 고려 문신 정포가 '해운대'란 한시에서 해운대 최초 언급

 

8. 조선시대 (1392년 ~ 1910년)

- 간비오산 봉수대 축제 (세종이전 ~ 1894년)

- 임진왜란 순절 남원양시 3인남 충혼 모신 삼절사 건립 (1839년)

- 지방행전 자로 동하면 고문서 (조선후기)

간비오산 봉수대(좌) 삼절사(가운데) 동하면 고문서(우)

9. 일제강점기 (1910년 ~ 1945년)

- 장산 항일 학생 촛불 시위 (1926년)

- 동해남부선 (부산진 ~ 해운대 간) 개통 (1934년)

- 수영비행장 개장 (1940년)

동해남부선 해운대역(좌) 수영비행장(가운데) 수영비행장 개장식(우)

10. 현대 (1945년 ~ 2000년)

- 해운대 최초 향토기업 동일한천 영업 (1946년)

해운대 최초 향토기업 동일한천

- 해운대 최초의 극장 해운대극장 개관 (1951년)

- 공설 해운대해수욕장 개장 (1965년)

- 부산 최초 특급 극동호텔 개관 (1966년)

부산 최초 특급 극동호텔

- 부산직할시 해운대출장소 개소 (1976년)

- 부산직할시 해운대구로 승격 (1980년)

- 초대 해운대구의회 개원 (1991년)

- 해운대신시가지 조성 (1991년 ~ 1998년)
- 지방자치시대(민선1기 구청장) 개막(1995년)

11. 현대 (2000년 ~ )

- APEC 정상회의 개최 (2005년)

- 컨벤션 해양레저 특구 지정 (2005년)

APEC 정상회의(좌) 컨벤션 해양레저 특구(우)

- 중국 양주시(한강구)와 국제교류 (2007년)

- 반송보건지소 (2008년) 및 반송건강증진센터 건립 (2009년)

중국 양주시(한강구)와 국제교류(좌)  반송보건지소 및 반송건강증진센터(우)

- 도시철도 반송선 개통 (2010년)

- 영화의 전당 개관 (2011년)
- 해운대구 문화복합센터 준공 (2013년)

 

- 청사포 다릿돌전망대 준공 (2017년)

- 해운대 인문학도서관 개관 (2018년)

- 해운대구육아종합지원센터 개관 (2018년)

- 동해선 원동역 개통 (2020년)

 

장산국 건국신화

 

「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편에는 '장산국을 신라가 정복해 거칠산군을 두었다가 후에 동래군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장산국은 철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한 시이게 성립된 취락 단위의 부족국가였습니다. 해운대 장산에 장산국터가 남아 있어 장산 동북쪽 장자벌을 중심으로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산국의 건국신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득한 옛날 해운대 장산 기슭 장자벌에서 고씨 성을 가진 처녀가 홀어미와 함께 토막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여름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다가 그치더니 멀리 동쪽 하늘에 영롱한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고씨 처녀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비단옷을 입은 선인이 나타나더니 무지개를 타고 곧장 고씨 처녀의 집 앞에 다가섰습니다. 선인은 목이 말라 물을 청하였는데 물그릇 속에 비친 처녀이 얼굴이 선녀보다 아룸답고 옥처럼 빛나 그만 매혹되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은면서 혼인을 하였습니다 이들 부부는 장자벌의 땅을 모두 일구어 식량을 마련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동안 이들 사이에는 아들 열 명과 딸 열 명이 태어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자식들은 모두 장성하였고 제각기 스무 곳의 마을에 흩어져 그 마음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선인은 마을에 토성을 쌓아 그 부족을 다스리는 대족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처녀를 만나 결혼한 지 60년이 되자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다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때부터 고씨 처녀는 선인의 뒤를 이어 부족을 다스리는 고씨 할매가 되었습니다

고씨 할매는 선인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자녀를 낳던 제왕반 바위에 제단을 차려놓고 날마다 옥황상제께 선인의 귀환을 간절히 빌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씨 할매 꿈속에 남편이 나타나 "나를 찾을 생각은 말고 나의 형체를 보고 싶거든 장산 정상으로 오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고씨 할매는 장산을 오르다 정상을 몇 발자국 앞두고 그만 미끄러져 목슘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스무 곳 마을에 흩어져 살던 아들, 딸들은 어머니가 숨졌다는 소식을 드고 모두 그 씨족을 이끌고 와서 큰 무덤을 만들어 안창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족의 수호신으로 고씨 할매의 넋을 모시기 위해 사당(재송당산)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구) 장산 정상 표석비 : 위 정상 표석비는 1999년 세워져 2022년 3월까지 장산 정상을 지킨 표석비로 추정되며, 해운대구 장산 구립공원 지정과 장선 정상 민간 개방에 즈음하여 해운대문화원에서 새로운 장산 정상 표석비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그동안 장산 정상을 지켜왔던 (구) 장산 정상 표석비를 해운대구 역사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습니다.

해운대의 구석기 문화

 

부산지역에서는 구석기 유적이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1990년대 초 부산박물관의 정밀 조사결과 해운대의 청사포와 좌동, 중동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됨으로서 부산지역 구석기 문화의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운대지역에서 발굴된 구석기 유적은 바닷가와 가까운 낮은 구릉상에 위치합니다. 좌동, 중동 구석기유적은 석기 제작과 관련된 망치돌, 모루돌 등이 다수 출토되고, 유적의 입지로 보아 당시 해운대 지역에서 생활했던 구석기인들이 석기 등을 제작했던 야외 생활유적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구석기인들은 바닷가와 야산에서 수렵과 채집을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생업활동에 필요한 찍개, 긁개, 밀개, 자르개, 새기개, 돌날, 칼돌, 망치돌, 모루돌 등 각종 석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이들 석기 중 정밀한 기술로서 제작된 좀돌날과 몸돌의 형태는 동아시아의 후기 구석기문화를 이해하는데 그리고 일본 구주지역의 주석기문화와 교류 관계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유적의 형성 시기는 세석인 기법과 석기의 제작수법, 형태적인 특징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되며 연대는 BC. 20,000 ~ BC. 15,000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좌동, 중동유적 구석기

청사포유적

 

청사포유적은 1990년 초 부산박물관의 부산지역 문화재 지표조사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되었으며 해운대구 중동 청사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유적은 청사포 해안의 뒤편 구릉 상에 입지하고 그 아래쪽에는 동헤남부선 철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현재 유적 주변은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여기서 출토된 석기류는 니암제의 박편과 석인, 석인상박편, 원반형석기, 박편석기 등이 있습니다. 유적의 성격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확실하나 주변 입지와 출토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해운대 좌동, 중동 구석기유적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적의 시기는 BC 15,000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청사포유적은 부산지역에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서, 부산의 역사를 구석기시대까지 끌어 올린 단서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사포 유적 구석기

부산의 청동기문화

 

약 3천5백년 전, 북방으로부터 한반도에 벼농사와 청동기, 마제석기, 무문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면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고, 점점 더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지역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부산지역에서 청동기문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한 자료가 없어 알 수가 없지만 해운대 반여동, 기장 방곡리, 동래 노포동 주거유적의 예로 보아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이 지역에 농경문화가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동기인들은 바닷가와 하천 주변 혹은 낮은 구릉지대에 마을을 형성하면서 농경과 어로 생활을 하였으며, 이와 관련한 많은 유적이 부산 곳곳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산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의 주요 유적으로는 반여동, 노포동, 온천동, 오륜동, 방곡동 주거지를 비롯하여 사직동, 감천동, 가덕도고인돌, 조도패총 등이 있습니다.

특히 해운대 반여동유적의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 아가리에 구멍이나 짧은 선을 그어 장식한 토기, 화살촉, 돌칼, 돌창, 돌도끼, 돌끌, 가락바퀴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들은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생활상화 문화를 잘 보여 줍니다.

반여동 주거지 출토석기 (청동기시대 BC 10 ~ 8세기)

반여동 고분

반여동고분은 수영강에 인접한 구릉 지대에 위치하며 1986년과 1988년 2차례에 걸쳐 동의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조사되었습니다. 여기서 5~6세기에 걸치는 목곽묘, 석곽묘, 웅관묘 등 다양한 구조를 갖춘 31기의 분묘가 발굴되었으며, 특히 석곽묘는 벽면에는 회흑색점토를 두텁게 발라 마감한 것이 특징입니다.

부장품으로는 목긴 항아리, 굽다리접시, 손잡이 달린 발, 그릇받침 등의 토기류와 철제칼, 창, 화살촉, 덩이쇠, 금제 귀걸이, 유리목걸이 등 다양한 철기와 장신구류가 출토되었습니다. 반여동유적은 고분에서 철제 무기류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보아 수영강 주변의 중심세력인 복전동과 연산동고분 집단의 하위에 속하면서 수영강 일대를 관할하던 집단의 분묘유적으로 추정되며, 여기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은 삼국시대 해운대지역의 고분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젱보를 제공합니다.

(좌) 반여동 고분 출토 토기 (우) 좌동유적 출토 토기

 

삼한, 삼국시대의 부산

 

청동기시대 후반 무렵 중국으로부터 철기문화의 유입으로 삼한시대(BC 2C ~ AD 3C)가 성립되면서 부산지역은 본격적인 역사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변한 12국 중의 하나인 독로국의 중시 무대가 됩니다. 이 시기의 문화 현상으로는 와질토기라는 새로운 토기와 목관묘가 등장하고 철제로 만든 다양한 도구와 무기가 출현합니다. 구서동과 노포동고분군, 동래패총 등은 삼한시대 문화를 잘 보여주는 부산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동래패총에서는 각종 생활 도구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을 알 수 있는 어패류와 동물뼈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이 시기의 생활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철기사용이 일반화되고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격동기를 맞이하면서 삼한 소국들은 인접한 소국과 연맹을 맺거나 병합(통합) 되기도 합니다. 부산의 독로국은 김해의 구야국과 연맹을 맺어 금관가야를 구성하고, 4세기 이후부터 5세기 초까지 가야문화를 공유합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금관가야가 쇠퇴하고 신라가 이곳으로 진출하면서 신라에 편입되고, 신라문화가 정착됩니다. 이 시기의 유적은 모두 분묘이며, 복천동, 연산동, 반여동, 당감동, 화명동, 덕천동, 괴정동, 오륜대유적 등이 있습니다. 이들 유적은 대부분 온천천과 수영강 주변에 분포하며 여기서 출토된 각종 가야토기와 철제무기, 갑옷, 금동관, 장신구류 등은 당시 부산지역 가야문화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천년의 석각 - 해운대 석각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 45호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710-4번지 소재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710-4번지 APEC 기념 전망대 아래에는 「해운대」 라는 석각이 있습니다. 신라 하대의 학자요 문장가인 최치원이 정계 은퇴 후 전국을 유람하던 중 이곳 주변의 자연경관이 너무나 빼어나 자신의 자(子)를 따 「헤운대」란 세 글자를 바위에 새겨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 설의 사실여부는 증거가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려 문신인 정포의 시에 "대(臺)눈 황폐하여 흔적이 없고 해운(海雲)이란 이름만 남아 있구나" 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후기에 이 석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최치원 선생(해운대 선생 약선집) : 최치원 역사적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한 책

조선시대의 해운대

 

해운대는 조선시대에는 동래부 9개 면 가운데 동면에 소속되었습니다

동면의 상단에는 지금의 석대동, 반송동, 반여동 등이, 그리고 하단에는 재송동, 우동, 좌동, 중동이 있었습니다. 1789년 당시 동면의 가호수는 725호였으며, 인구수는 3,417명이 달했습니다. 면의 행정은 자치규약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풍헌과 약정이 그 책임을 맡았습니다. 동면은 군사상 요충지였습니다. 장산은 군선의 제작 등과 같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목재를 제공하기 위해 입산과 벌목이 금지된 봉산이었습니다. 또 간비오봉수가 설치되어 긴급상황을 신속하게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면은 해운대의 빼어난 풍광으로 인해 경향 각지의 유력 사대부들이 찾던 관광지이기도 하였습니다. 동면의 면민들은 장산의 감독관인 산임, 통영, 수영에서 파견된 우후, 해운대를 찾던 사대부 빈객 등을 접대하였으며, 둔전의 관리, 활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대나무를 베어 바치거나 도로, 교량을 수리하는 등의각종 면역도 부담하였습니다.

한편, 동면은 절의와 효를 숭상하던 고을이었습니다. 동래부 부곡리에 입향한 양조한과 양통한 형제는 임진왜란 중 목숨을 바쳐 왜적에 항거하였습니다. 이에 동래부와 사림을 중심으로 한 면민들은 삼절사라는 사우를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봄, 가을 향사를 올림으로써 이들의 호국정신을 이어나갔습니다. 석대 마을의 영양 천씨 문중은 교생 천성태부터 그의 현손에 이르기까지 5대에 거쳐 연달아 5명의 효자와 1명의 효뷰를 배출하였습니다.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인 이 문중의 효행은 조선후기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임란창의 공신을 기리다 - 삼절사

부산광역시 지정 문화재 자료 제 1호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신방송로 182번길 24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동에 위치한 삼절사는 동래부와 동래부 사림에서 임진왜란 중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남원양씨 3인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사우이다. 충민공 양지(1553년 ~ 1592년)는 삭녕군수로서 삭녕에서 왜군에 싸우다 전사하였숩니다. 양조한(1555년 ~ 1592년)과 양봉한(1559년 ~ ?)은 동래 부곡동에 입향한 양겸의 아들로 양조한은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양봉한은 화왕산성 전투에 참전하였습니다.

삼절사는 1839넌 동래 사림의 제의로 건립되었으며, 1840년 살미의 요청으로 경상감사가 계를 올려 일문삼절의 합사를 윤허받았습니다. 제수는 동래부에서 제공하였으며, 관리와 행사는 사림이 주관하였습니다. 삼정사 일지인 「삼절사고왕록」과 위패가 봉안된 3인의 행적을 기록한 「선세행적기」등 사우 관련자료 다수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대에 걸친 효행 - 석대 영양 천씨 문중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반송1동의 석대 마을의 영양 천씨 문중은 5대를 이어 5효자와 1효부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용양 천씨는 임진왜란 때 구원병으로 조선에서 출병했다가 귀화한 명나라 장수 천만리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이 석대에 입향한 것은 천찬석(4세손) 때이며, 이로부터 9 ~ 13대에 걸쳐 연달아 효행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교생 천성태(1725년 ~ 1789년)와 그의 아들 유학 천세모(1743년 ~ 1810년), 손자 유학 천술운(1767년 ~ 1835년), 증손자 유학 천상련(1795년 ~ ?), 현손 유학 천우형(1848년 ~ 1886년), 그리고 천우형의 처 김해 김씨입니다. 천성테는 부모가 병으로 위독하자 두 차례나 단지효행을 행하여 수명을 연장시켰고, 돌아기시자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3년 간 여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그의 효행은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가난한 가운데서도 부모가 위독할 때에는 단지를 행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무덤가 섬돌이 움푹하게 패일 정도로 여묘살이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특히, 천술운이 여묘살이를 할 때에는 여막 곁의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 사람들이 이 샘물을 효자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이들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1752년 부터 1919년 까지 170여 년에 걸쳐 살미이 상서와 등장을 올려 정려를 세우고 노력하였습니다. 석대마을에 있는 정려각에서는 지금도 매년 5월 5일이면 후손들이 모여 선조들의 넋을 기리고 효행을 본받기 위해 향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조선후기 해운대 행정의 모습 - 동하면 고문서

 

조선시대 동래부 동하면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 우동, 중동 일대입니다. 동하면 고문서(1714년 ~ 1924년)는 바로 이 지역의 자치행정과 관련된 문서들입니다. 「동하면호적」을 포함해 모두 30책이며, 동하면의 자치행정규범과 관련된 동중절목, 완의절목, 부세 및 재정과 관련된 둔답깃기, 양안구폐전리식리절목, 그리고 신당 중건 및 운영과 관련된 장산신당중건모연문, 장신신당제수금식리록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해운대 인물

 

1. 조선시대

- 동래 향교 위패를 지킨 양조한 (1555년 ~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동래향교 교수 노개방과 함께 향교의 위패를 지키다가 순절하였습니다

 

- 임란창의 공신 양통한 (1559년 ~ ?)

형 양조한의 죽음 이후 의병활동에 가담, 창녕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하였습니다

 

- 선무원종공신 문세휘 (1562년 ~ 1639년)

정유재란 때 망우당 곽재우를 따라 화왕산성을 지키며 전공을 세웠습니다.

 반송동 산 7번지에 묘소에가 있으며, 충렬사에서 향사합니다.

 

 - 단지 효행을 한 천성태 (1719년 ~ 1789년)

부모가 병석에 눕자 단지효행으로 연명케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습니다.

 

 - 선비의 표상 반계 정기진 (1809년 ~ 1885년)

 반여동 중리마을에서 출생, 한평생 뎍행을 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효제의 의를 권면하였습니다.

 

2. 근, 현대

 - 독립투사 정인찬 (1887년 ~ 1932년)
 개성학교를 졸업하고, 영도 옥성학교 교사로 재직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부산. 김해, 밀양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해 옥고를 치뤘습니다. 1920년 2월 출판법 위반으로 세 차례 투옥되었고, 일경의 혹독한 고문 끝에 1932년 7월 8일 순국하였습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 장인 조봉달 대목수 (1892년 ~ 1985년)

일제 강점기부터 부산에서 이름을 날렸던 장인 조봉달 대목수는 동래부 반여리(반여동)에서 출생하여 수많은 전통한옥과 사찰, 관공서 등을 지어 조대목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1960년 동래향교의 장의를 지낸 등 항교 건축물의 보존에도 관심이 높았습니다. 대목수가 남긴 목수연광과 농기구 등 유품 304점은 부산정보대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습니다.

 

- 항일 촛불시위 선구자 박영출 (1907년 ~ 1938년)
1925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 항일학생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 이후 일본유학길에 올라 경도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일제의 식민교육정책에 반대해 민족주의 교육실시를 주장다하가 투옥되어 모진 고문끝에 옥사하였습니다. 동래고 항일운동을 첫 장을 연 계기가 되었던 장산 항일 촛불시위사건을 주도하였습니다. 1977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촉장을 받았습니다.

 

- 김갑동 (1913년 ~ 2006년)

반여동 중리마을에서 대흘 이어 살아왔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사람이 경영하던 한천공장을 인수하여 1946년 반여동 수영강변에 순수한 우리기술로 한천공장을 재경영한 해운대구 최초의 향토 기업인입니다.

 

- 서예가 동계 박명찬 (1914년 ~ 1998년)
반여동 삼어마을에서 태어났으며 흠제 노영경에게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부산, 경남 지역의 문화재와 재실의 현판, 주련, 비문등을 썼습니다. 동래향교 전교를 지낸 부산의 큰 선비이자 서예가입니다.

 

- 항일투사 문인갑 (1923년 ~ 2008년)

반여동 중리마을에서 출생, 1941년 동래중 재학 시 조선독립당에 가입해 항일 투쟁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된 후 부산형무소에 1년 여 모진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출옥했으며, 1990년 애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습니다.

 

지명 유래

 

1. 우동

우동은 춘천의 오른쪽에 있다 하여 예부터 그렇게 불렀으며, 운촌, 지내, 장지, 승당 4개의 자연마을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중기에 동래부의 동면 우리에서 말기에는 동하면 우동리로 일제강점기에는 남편 우리로 변천되어 왔으며, 1966년 우 1,2동으로 분동되었습니다.

운촌은 해운대체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해운대의 발상지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장지 마을의 장지유수는 해운대 팔경의 하나였습니다

운촌과 승당마을 앞바다는 멸치의 황금어장으로 4월부터 10월까지 은백색 멸치떼들이 장관을 이뤘습니다.

 

 

2. 중동

중동은 해운대의 중심에 있는 동네라는 의미로 중동으로 명명됐습니다

1942뇬 수영출장소에 편입되면서 중일정, 중이정으로 분리되었다가 1953년 해운대출장소가 설치되면서 중1동, 중2동, 중3동으로 나뉘어졌다가 1955년 중1, 중2동으로 병합하여 중1동이 되고 중 3동은 그대로 남아있다가 1960년 중 2동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오산마을은 지형이 오동잎처럼 생겼고, 미포는 오우산의 꼬리에 해당합니다. 청사포는 푸른 뱀이 나왔다 하여 청사포라 불리다가 모래 사로 바꾸어 청사포로 불리고 있습니다.

 

3. 좌동

좌동은 달맞이 길이 생기기 전에는 해운대에서 송정, 기장 방면으로 왕레하던 길목이었습니다. 원래 대부분 군사보호구역이었으나 1993년 이후 신도시가 조선되면서부터 해제되었습니다

신도시 공사 중에는 구석기 유적이 발견돼 해운대 역사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산 위쪽 춘천발원지인 억새밭을 옛 사람들은 장지버들이라 불렀습니다.

 

4. 반여동

반여동은 원래 지형이 소반처럼 둥글다 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상리, 중리, 무정리, 삼어리 등 4개의 자연마을이 있습니다. 1896년 부산부에 속했다가 1957년 부산시 동래구로 편입되었습니다

1973년 반여 1, 2동으로 1979년엔 반여 2동이 반여 2, 3동으로 분동되었으며, 1980년 구 승격으로 해운대구로 편입되었습니다. 2005년 반여 1동이 반여 1, 4동으로 분동되어 4개 동이 되었습니다.

반여동은 고분군으로도 유명한데 출토된 유물은 부산의 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반여 2, 3동은 1970년대 서구 구덕 수원지인 수재민과 고지대 철거민이 옮겨와 단층 연립주택 지붕을 빨강, 파랑으로 칠해 무지개마을 이라고 불렀습니다.

 

5. 반송동

반송동은 기장현과 동래부의 경계를 이루는 마을이란 뜻에서 동면 지경리라 불리다 키가 작고 가지가 사방으로 퍼진 소나무가 울창하게 숲을 이루자 그즈음부터 반송동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1975년 반송동이 반송1, 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8년 반송 1동이 반송 1, 3동으로 분동되어 현재 3개의 동으로 구성되었고 운봉, 본동, 신리 3개 자연마을이 있습니다.

운봉산, 절터산, 진들개산, 무지산이 담처럼 싸고 있어 담안골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6. 제송동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에 보면 '재손동은 동래부의 동쪽 10리에 있으며 소나무가 만 그루나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가졌다 하여 송수촌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재송동은 동래군 동면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동래군 남면에 편입되었습니다. 이후 1946년 부산부 수영출장소에 소속되었다가 1957년 동래구 편입 후 1987뇬 해운대구로 편입되었으며 1991년 재송1, 2동으로 분동되었습니다.

옛날 재송동에는 뒷골, 서당골, 한골이라는 세 개의 계곡이 있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고장입니다.

 

해운대 12경

해운대의 어제와 오늘

- 제 1경 : 해운대 해수욕장

- 제 2경 : 송정해수욕장

- 제 3경 : 동백섬

- 제 4경 : 달맞이길

- 제 5경 : 영화의 거리

- 제 6경 : APEC 나루공원

- 제 7경 : 부산 아쿠아리움

- 제 8경 : 장산

- 제 9경 : 동해남부선 옛길

- 제 10경 : 수영만 요트경기장

- 제 11경 : 청사포

- 제 12경 : 해운대 온천

해운대 문화재

- 조숭가정대부상의중추원사 도평의사사사왕지 (1396년 - 태조5년) : 국가지정 보물 제 953호 (지정일 : 1988년 6월 16일)

- 조서경무과급제왕지 (1396년 - 태조 5년) : 국가지정 보물 제 954호 (지정일 : 1986년 6월 16일)

- 동래부동하면고문서 (조선후기) : 부산광역시지정 유형문화재 제 24호 (지정일 : 1993년 12월 31일)

- 송정역 : 국가지정 등록문화제 제302호 (지정일 : 2006년 12월 4일)

- 삼절사 : 부산광역시지정 문화재자료 제1호 (지정일 : 1986년 5월 29일)

- 관음정사 석조보살좌상 : 부산광역시지정 문화화재자료 제 50호 (지정일 : 2009년 12월 7일)

- 해운대 석각 :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 45호 (지정일 : 1999년 3월 9일)

- 동백섬 :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 46호 (지정일 : 1999년 3월 9일)

- 천제단 : 부산광역시지정 민속자료 제 6호 (지정일 : 2009년 12월 7일)

- 마고당 : 부산광역시지정 민속자료 제 6호 (지정일 : 2009년 12월 7일)

 

해운대 자매도시 및 우호도시

1. 국내 교류도시

 

지역 자매결연 체결일 교류내용
전남 해남군 1994년 6월 1일 농, 특산물 직거래 장터 운영, 영호남 청소년 어울마당 개최, 해운대 달맞이 축제 초청 등
충북 제천시 1998년 1월 8일 의병제 참관, 한방 엑스포 홍보, 해운대 영화의 거리 방문 등
경남 하동군 2007년 6월 28일 농, 특산물 직거래 장터 운영, 군민의 날 참석, 섬진강 생태학교 참석 등
경북 영주시 2008년 5월 28일 농, 특산물 직거래 장터 운영, 문화유적 탐방, 풍기인삼축제 참석 등

 

2. 해외 자매도시 및 우호도시

 

자매도시 (2개국 2개 도시)
국가명 도시명 결연일자
중국 한강구 2007년 1월 15일
필리핀 파라냐케시 2015년 9월 4일
우호도시 (3개국 5개 도시)
국가명 도시명 결연일자
중국 양주시 2007년 1월 16일
캄보디아 시엠레아프시 2014년 3월 15일
중국 헤구시 2015년 9월 21일
몽골 항올구 2017년 9월 22일
중국 일조시 2019년 7월 27일

 

마지막에는 타임캡슐이 있습니다

 

2013년 해운대가 2080년 해운대에게

타임캡슐은 동백섬의 '헤운대 석각'을 본뜬 석각비 안에 수장합니다

해운대 석각은 해운대의 이름을 지어주신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 선생이 직접 쓰신 '해운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타임캡슐에는 2080년 미래 구청장과 주민에게 전하는 '배덕광 구청장의 영상 메시지', 미래세대에 전하고 싶은 43만 구민의 마음을 담은 소망편지, 해운대구가 부산시 직할 출장소에서 해운대구로 승격된 해인 1980년에 태어난 주민과 2013년에 태어난 아이를 둔 가족 모습을 담긴 사진, 2013년 구청백서, 통계연보와 같은 행정자료 등 모두 1,400점의 소중한 자료를 담았습니다.

 

해운대구 승격 100주년이 되는 2080년 4월 1일 개봉 예정일까지 길고 긴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될 이 타임캡슐이 미래 해운대사람들에게 21세기 선조들의 발자취와 따뜻하면서도 열정 어린 마음을 전해주길 빌어봅니다

 

서기 2013년 11월 9일

 

해운대 역사관 내에 있는 타임캡슐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