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매축지 마을과 매축지 문화원

여행/박물관

by MasterHwan[마스터환] 2016. 8. 24. 12:59

본문

마더, 친구, 한류인생, 아저씨 등을 촬영한 매축지 마을   좌천역에 내려 조금만 걸으면 쉽게 매축지 마을에 갈수 있었다.

매축지 마을 가기 전 육교에는 매축지 마을에서 촬영한 영화 몇 컷이 전시되어 있었다.

육교를 지나 매축지 마을안에 들어서니 매축지 마을 지도를 볼 수 있었다.

매축지 마을을 구경 하던 중 매축지 문화원이 눈에 들어왔다.

매축지 문화원에는 매축지 마을의 역사와 매축지 마을지도 등이 전시 되어 있었다.

매축지 마을에서 태어난 안용복 장군
 

조선 숙종 때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인 것을 일본막부가 자인하도록 활약한 민간 외교자이자 어부, 국토수호 기공불멸의 장군이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러 간사한 마음을 꺽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벌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이리다. 울릉도는 척박하다. 그러나 대마도는 한 조각의 농토도 없고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우환이 되어왔는데, 울릉도를 한번 빼앗기면 이것은 대마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니 앞으로의 앙화(재난)을 이루 말하겠는다. 그러니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만이 아니었다. ...... 그런 사람을 나라의 위기 때 병졸에서 발탁해 장수로 등용해 그 뜻을 펴게 했다면, 그 성취가 어찌 여기서 그쳤겠는가.

<성호 이익(1681 ~ 1763) : [성호사설] 중>

100년의 작은 역사를 가진 마을 매축지 이곳은 불과 백여년 전만 해도 대부분이 바다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일본군 막사, 군마를 보관하던 마구간을 만드는 등 매축지마을을 병참기지화 하였다.

민족의 아픔으로 시작 된 마을, 바다를 메워 만들다.



  부산진 제2차 매축공사 시기에 조성된 지역으로 1926년부터 1932년까지 공사를 시행하여 162,050평의 부지를 공장지대로 활용하고자하였다. 그러나 매축이 완료되어도 중일전쟁 등으로 수요자가 나타나지 않고 빈터로 남아 각종행사가 이곳에서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정월대보름에 민족정기를 북돋운 부산사람들의 줄다리기가 매축지 공터에서 행해진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분단의 슬픔을 품고 보듬어 주었던 우리 민족의 보금자리


  6.25 전쟁을 겪으며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려왔고, 급하게 마구간을 칸칸이 잘라서 임시거주지로 사용하게 되었다. 3~4평에 불과한 집들, 한명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좁디좁은 골목은 이런 연유로 만들어졌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