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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 부산특별전

행사/행사 참여 후기

by MasterHwan[마스터환] 2023. 6. 12.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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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마스터환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6. 25전쟁으로 인한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 제 2군수사령관에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온 리차드 위트컴 장군은 6. 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부산을 재건하고 의료시설을 건립하는 등 우리나라를 위해 평생을 헌신 하셨습니다. 지금은 리차드 위트컴 장군을 기억하고자 부산특별전 사진전을 개최중입니다. 저도 지하철 1호선 중앙역 12번 출구 교보빌딩 앞에서 진행하는 리차드 위트컴 장군 부산특별전에 다녀왔습니다.

 

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 부산특별전

리차드 위트컴 장군
1894년 12월 27일 ~ 1982년 07월 12일

 

위트컴 장군은 미 제2군수사령관으로 부임하여 6. 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부산의 재건, 전쟁고아 지원, 교육환경 조성, 의료시설 건립 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습니다. 군복 입은 선교사였던 장군의 인류애 정신과 리더십을 기억하고 감사히기 위하여 본 기념 조형물을 건립하였습니다.

 

생애 및 업적

 

- 1894년 12월 27일 미국 캔자스주 토피카에서 출생

- 1916년 미 육군 소위 임관

- 1941년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아이슬란드 수송책임장교

- 1944년 영국 브리스톨 해협 제 11항만단 지휘관

-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군수지원

- 1945년 마닐라 항구 지휘관

- 1950년 그린란드 툴레 공군기지 건설을 위한 군수 지원

- 1952년 그린란드 및 캐나다 해안 조기경보기지 건설을 위한 군수 지원

- 1953년 제 2군수사령관 (한반도 전구에 대한 군수 지원)
- 1954년 전후 부산의 구호와 재건

- 1954년 12월 퇴역(육군 준장)

- 1955년 ~ 이승만 대통령 정치고문, 한미재단을 통해 한국 구호 및 재건 지원

- 1960 ~ 1970 베트남 및 캄보디아 군사고문

- 1982년 7월 12일 서울에서 별세(89세), UN평화기념공원 안장

- 2022년 11월 11일 무궁화장(국민훈장 1등급) 추서

 

 

전쟁 폐허, 대화재 속에서 부산을 재건
- 절망에서 희망을 선물하다 -

 

1953년 11월 27일 중구 영주동에서 발생한 대화재는 부산역, 부산우편국, 부산방송총국 등을 태우고 교통, 통신, 방송 등 도시기능을 마비시켰습니다. 이 화제로 주택 3,132 채가 전소되었으며 사상자 29명, 6,000여 세대 3만여 명의 이재민이 생기는 등 현재 화폐 가치로 1조 8천억 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제2군수사령관 위트컴 장군은 즉각적인 이재민 구호를 위해 임시 천막존을 설치하였고, 창고를 개방하여 식량, 의류, 침구류 등 군수물자를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승인 없이 군수물자를 나누어 준 이유로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된 장군은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역설하여 의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고, 더 많은 원조 지원 약속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군이 중심이 된 AFAK(대한군사원조, Armed Forces Assistance to Korea) 프로그램을 활용하여 단순한 화재복구가 아니라 부산시 전체에 대한 재건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총 191개의 프로젝트로 세분화하여 영도와 양정동에 400세대의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은 물론 병원 및 학교건립, 도로건설, 전쟁고아 지원 등의 사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부산의 재건을 이끈 위트컴의 리더쉽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이었습니다.

 

전쟁 폐허, 대화재 속에서 부산을 재건 - 절망에서 희망을 선물하다 -

전쟁 고아의 아버지
- 길 잃은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다 -

 

위트컴 장군에게 전쟁고아 지원은 AFAK 프로그램의 최우선 사업이었습니다. 그는 88개의 예하부대와 보육시설들을 연결하여 체계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그는 부대인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옷, 선물, 기부금을 보내도록 했으며, 고아들이 자립하도록 직업교육에도 힘을 썼습니다. 또한 장병들의 편지와 신문, 방송을 활용하여 본국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후원 받았습니다. 그는 퇴역 후 아이젠하워 대통령, 밴 플리트 장군과 함께 '한미재단'을 통해 한국 재건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전쟁고아들을 위하여 수많은 보육원을 지원하였습니다. 1964년 위트컴 장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보육시설인 '익선원'을 설립한 한묘숙 여사와 만나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고, 이후 부부는 평생을 전쟁고아를 돌보고 한국을 재건하는데 헌신했습니다.

 

전쟁 고아의 아버지 - 길 잃은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다 -

메리놀병원 등 근대 의료시설 건립
- 파란 눈의 성자로 불리다 -

 

1954년 피난민촌을 방문중이던 위트컴 장군은 산모가 보리밭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열학한 의료시설 개선이 절실하다고 여겨 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복음병원 등의 병원 건립에 앞장섰습니다. 이는 장군이 주도하는 AFAK 프로그램을 통하여 진행되었습니다. 메리놀병원이 공사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병원런립기금 조성을 위해 월급의 1%를 기부하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당시 위트컴 장군이 한복을 입고 거리에서 모금 켐페인을 하는 모습이 미국 라이프지(1954년 10월 25일)에 소개되기도 하였습니다.

메리놀병원 등 근대 의료시설 건립 - 파란 눈의 성자로 불리다 -

부산대 캠퍼스 등 교육환경 조성
- 인재육성의 기틀을 마련하다 -

 

위트컴 장군은 전후 폐허가 된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교육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인식한 가운데 AFAK를 활용하여 많은 학교를 신축하고 개축하였습니다. 1954년 위트컴 장군은 윤인구 총장으로부터 당시 목조건물(서대신동)이던 부산대학교의 부지확보와 대학 건립에 대한 도움을 요청받았습니다. 종 모양으로 그린 캠퍼스 지도 한 장을 들고 "교육에 대한 내 꿈을 사 달라"고 부탁하는 그의 비전에 공감한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과 미 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을 설득해서 장전동 일대 약 165만m2(50만평)의 부지를 무상공여하고, 25만 달러의 AFAK 자금을 지원하였습니다. 또한 예하 공병부대가 진입로(온천장 - 장전동 캠퍼스)와 학교 부지조성 공사를 직접 지원함으로써 오늘날 부산대학교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부산대 캠퍼스 등 교육환경 조성 - 인재육성의 기틀을 마련하다 -

한국전쟁 미군 유해 송환
- 평생의 숙원을 부인이 이어가다 -

 

위트컴 장군은 6. 25전쟁 당시 장진호 전투 간 영하 40도가 넘는 얼음 땅에서 '마미'를 외치며 죽어간 미군의 유해를 찾아 조국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숙원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미군 유해 송환을 위해 중국의 관계자들과 협의를 통해 아내 한묘숙 여사를 홍콩을 거쳐 중국, 북한으로 입국하게 하였습니다. 1982년 위트컴 장군이 별세한 이후에도 한 여사는 '위트컴 희망재단'을 설립하고, 장군이 남긴 얼마간의 유산과 연금을 모두 투입하여 북한을 23차례나 방문하면서 미군 유해발굴과 송환활동을 지속하였습니다. 2017년 1월, 한 여사는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장군의 숙원인 미군 유해 송환을 위해 헌신하다가 유엔평화기념공원에 장군과 합장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미군 유해 송환 - 평생의 숙원을 부인이 이어가다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여기에 잠들다

 

위트컴 장군의 업적과 그에 대한 평가가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그가 한국을 사랑했던 마음과 구호의 손길은 전쟁 이후 힘들었던 부산을 일으키는 힘이 되었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가 됩니다.

1982년 위트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부산 UN 기념공원에 안장되어 그의 삶의 시계는 멈췄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자세는 여전히 남아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좌) 유엔기념공원 (우) 매년 7월 12일 추모식
(좌) 유엔기념공원 내 위트컴 묘지 (우) 유엔평화 기념관 상설전시관

 

위트컴 장군 기념조형물 건립을 위한 시민위원회 설립

 

2022년 11월 11일 "턴투워드 부산"에 맞춰 위트컴 장군의 부산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시민위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학계, 정계, 재계, 종교계, 일반시민 등 각계각층의 100여 명 시민을 중심으로 많은 손길을 모아서 장군의 조형물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부산 역전 대화재 때 3만 명의 이재민을 도와주신 장군의 업적을 기려 3만 명의 대한민국 국민이 1만 원씩 내어 동상을 건립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합니다. 위트컴 장군의 정신을 기리는 동상 건립에 함께해 주시길 바랍니다.

 

위트컴 장군 기념조형물 건립을 위한 시민위원회 설립

부산항

 

- 중구 영주동 산복도로 변에서 본 부산항 입니다

- 오륙도에서 영도, 1부두에서 4부두까지 당시 부산항의 파노라마사진

- 중앙 부두는 일제강점기 부두 축조공사 후 매립지 공사가 끝나지 않아 호수처럼 보입니다

- 우측 중앙아래 지점에 첨탑건물이 부산세관입니다

- 구릉 흰색선 밑 지금의 외환은행 중앙동지점 자리엔 철도호텔과 물산장려관이 붙어 있습니다

 

부산항

메리놀 병원

 

-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현 가톨릭센타 인근에서 메리놀 진료소로 출발한 메리놀병원

(좌) 신축현장 (우) 축성식을 위한 준비
(좌) 기공식 행사모습(부대장) (우) 기공식 행사모습(원장수녀)ㅌ

그때 그 시절
자갈치 시장

 

이동식 점포(담배, 초콜렛, 뻥튀기, 과지류) 접이식 나무케이스로 제작하여 일명 '좌판'이라 불리우는 이러한 행상들은 이동이 자유로워 어느장소에서도 쉽게 난전을 열수 있습니다
(좌) 시장의 거리 -  포목, 잡곡 가게 (우) 과일 가게
(좌) 강냉이 박상을 파는 할머니 (우) 누더기 옷을 걸친 전쟁고아
지하철 1호선 중앙역 12번 출구 교보빌딩 앞에서 진행중인 리차드 위트컴 장군 부산특별전 행사장

 

지금까지 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 부산특별전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한국인 보다 한국을 사랑한 리차드 위트컴 장군 부산특별전외에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 행사, 강연, 공연, 각종 생활정보, 창업, 취업정보가 궁금하시면 케이빅을 검색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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