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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래 야경 명소 달빛 품은 동래부 동헌

여행/야경

by MasterHwan[마스터환] 2024. 6. 2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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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마스터환입니다. 동래읍성과 동래시장주변에는 조선시대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된 동래부 동헌이 있습니다. 최근 동래부 동헌은 야경경관을 설치하여 달빛 품은 동래부 동헌으로 재탄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포스팅에서는 부산 동래 야경 명소 달빛 품은 동래부 동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산 동래 야경 명소 달빛 품은 동래부 동헌

 

동래부 동헌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소재지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112번길 61(수안동)

 

 

동헌은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으로 일명 아헌이라고도 하며, 객사 다음으로 중요한 관아시설로 이청, 무청, 향청 등 각종 관아 건물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곳입니다. 동래는 일본과 가장 접경지로서 한반도 제일의 국경이자 전략요충지로 충시된 만큼 일찍부터 읍성과 관아가 설치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더욱 중시되어 태조 때부터 진을 두고 그 우두머리인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하도록 하였고, 명종 2년(1547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어 정3품 당상관으로 부사를 임명했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동래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어 효종 6년(1655년)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동래부의 군사권을 독립시켜 동래 독진을 설치하고, 관아도 대대적으로 복구하였습니다.

 

동래부 관아는 대원군 집권기까지 빈번히 증, 개축되다가 고종 3년(1866년) 병인양요를 겪고, 부사 정현덕의 주도로 일본의 침공에 대비해서 읍성과 함께 대대적으로 증, 개축 되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 10월 일제는 오랜 행정중심으로서의 위상과 정통성을 말살하고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부산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동래부를 없애고 부산부를 설치하였다가 1914년에는 부산부와 동래군으로 나웠습니다. 동헌의 중심 건물인 충신당은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흡수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의 연심당과 독경당, 문루였던 망미루, 외대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부속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충신당과 연심당을 제외한 건물들은 없어지고, 망미루와 동헌 외대문은 온천동 금강공원 일원으로 옮겨 졌습니다. 2014년 독경당, 찬주헌을 복원하고 망미루와 동헌 외대문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왔으며, 2015년 고마청을, 2018년 완대헌을 각각 복원하였습니다.

 

동래부 동헌 일원은 조선시대 부산(동래)의 행정, 국방, 외교, 교역 업무를 도맡았던 제일 국경방위의 위상을 함축하는 관아시설일 뿐 아니라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개혁적 이론에 따라 근대적 읍성의 설치가 최초로 구현되는 등 조선시대 국경 방위의 역사와 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역사적 장소 입니다

 

- 이청 : 조선시대 주방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들이 근무하는 관아

- 무청 : 장교들이 군사업무를 처리하던 관아

- 향청 : 조선시대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

- 경주진관 : 조선시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휘하 육군부대인 경주진의 관할

 

 

동래부 동헌 연심당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연심당은 동래부 동헌의 부속건물로서 동래부사의 살림집인 관사 또는 문신들의 대기소로 추정됩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없어진 동래부 동헌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에 의하면, 1626년(인조 4년) 공수청이 지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충신당과 완대헌 등 그 외 부속건물들이 다시 지어지거나 새로 세워졌습니다. 연심당은 1731년 (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충신당 동쪽에 8칸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이 연심당은 1937년에 출판된 교남지 권49에 나오고 있고,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에 흡수되어 합쳐질 때 양산군의 것이 되었습니다.

 

부산시는 1983년 연심당과 건물터를 샀습니다. 1989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연심당과 담 일부는 뜯어고쳐진 뒤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습니다.

 

(좌) 동래부 동헌 연심당 야경 (우) 동래부 동헌 연심당 낮

동래부 동헌 충신당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충신당은 조선시대에 동래부사가 공적인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1636년(인조14년) 부사 정량필이 창건하였고 1711년(숙종 37년) 부사 이정신이 충신당이라는 현판을 걸었습니다. 일제기대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양산군 보건소 동부지소로 사용 되기도 하였습니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는 좌우에 방이 있고 가운데 대청을 두어 수령은 대청에서 공무를 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래군청 등 관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면, 천장, 마루 등이 개조되었습니다. 현재 부산지방에 남아있는 조선시대의 단일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유일한 동헌 건물로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건축 양식을 짐작할 수 있는 문화재 입니다.

 

(좌) 동래부 동헌 충신당 야경 (우) 동래부 동헌 충신당 낮

 

충신당에는 전통의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전통의상체험

 

- 이용시간 : 10:00 ~ 16:00 (화 ~ 일)

- 체험장소 : 충신당 (체험비 무료)

- 문의 : 동래구 문화관광해설사, 동래구 문화관광과

 

동래부 동헌 독경당

 

독경당은 동래부 동헌의 부속건물로서 부사의 휴식공간 또는 무관들의 대기소로 추정됩니다.

 

독경당은 처음 정확히 언제, 어디에 세워졌던 건물인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후 독경당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에 의하면, 1675년 (숙종 1년) 동래부사 어진익이 지었는데, 6칸으로 충신당 서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1870년(고종 7년)쯤 동래부사 정현덕이 독경당을 고쳐 지어 6칸이었으므로 규모는 이전과 같았습니다. 독경당은 1937년에 출판된 교남지 권 49에는 나오고 있으나, 그 뒤에는 없어져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래구는 2013년에 건물터를 확보하고, 설계에 들어가 2014년 3월에 독경당을 다시 지었습니다

 

(좌) 동래부 동헌 독경당 야경  (우) 동래부 동헌 독경당 낮

망미루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유산

 

 

이 누각은 1742년 (영조 18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동래부 청사인 동헌 앞에 세운 문루 입니다.

 

옛날 한양으로부터 부임해 온 어느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이 누각을 망미루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1919년 동래의 3.1 운동은 이 누각에서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앞면에는 동래도호야문 이라고 쓰여진 큰 현판이 걸려 있고, 뒷면에는 망미루라는 큰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고종32년 (1895년)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라고도 불렀습니다. 누각 위에는 동래성 4대문의 여닫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높은 기둥을 받치는 돌 (주초석) 위에 놓여 있습니다. 팔작 지붕으로 된 2층 누각이며, 건축(공포) 양식은 2익공 입니다. 마루는 우물 정자 모양의 마루이며, 주위에 계자난간을 둘렀습니다. 처마는 서까래가 두 겹으로 된 겹처마입니다. 이 누각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대문으로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건물입니다.

 

본래 이 누각은 동래부 동헌 앞에 세워졌는데, 1930년경에 금강공원 주변으로 옮겨졌다가 2014년 12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습니다.

 

(좌) 망미루 야경 (우) 망미루 낮

 

동래부 동헌 고마청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고마청은 조선 현종 때 전염병이 크게 번져 더욱 부족하게 된 관아 수요의 말을 충당하기 위해 고마법을 만든 후 민간에서 거둬들인 말을 관리하던 곳이었습니다

 

동래부 동헌 고마청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에 의하면 1683년(숙종 9년) 동래부사 소두산이 처음 만든 후 1700년 부사 김덕기가 고쳐 지었고, 1731년 (영조 7년)에는 부사 정언섭이 사무실을 지었습니다.

 

동래부사 정현덕이 1869년 (고종 6년) 부터 동래읍성 안의 많은 건물들을 고쳐 짓거나 다시 지을 때 고마청에 대한 기록은 없었으나, 1937년 동래군지를 펴낼 때는 이미 뜯기고 잃었다고 합니다

 

이에 동래구는 2014년에 건물터를 확보하고, 설계에 들어가 2015년 12월에 고마청을 다시 지었습니다.

 

(좌) 동래부 동헌 고마청 낮 (우) 동래부 동헌 고마청 야경

(좌) 동래부 동헌 고마청 (우) 여물통
(좌) 동래부 동헌 고마청 아궁이 낮 (우) 동래부 동헌 고마청 아궁이 야경

 

 

동래부 동헌 완대헌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완대헌은 동래부 동헌의 부속건물로서 부사가 허리띠를 느슨하게 하고 쉬는 휴식공간이었습니다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에 의하면, 완대헌은 8칸으로 충신당 북쪽에 있으며, 1636년 (인조 14년) 동래부사 정량필이 세웠고, 1701년 (숙종 27년)에 부사 김덕기가 부용당을 헐어서 그 목재로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동래부사 정현덕이 1869년(고종 6년)부터 동래읍성 안의 많은 건물들을 고쳐 짓거나 새로 지을 때 완대헌을 6칸으로 새로 지어 그 전보다 칸수가 줄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완대헌은 1937년에 출판된 교남지 권 49에는 나오고 있으나,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없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래구는 2017년에 건물터를 확보하고, 설계에 들어가 2018년 6월에 완대헌을 다시 지었습니다.

동래부 동헌 완대헌

 

동래부 동헌 찬주헌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동래부 동헌 찬주헌은 부사를 안전하게 경호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던 비장이 머물며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찬주헌은 임진왜란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언제, 어디에 세워졌던 건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찬주헌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에 의하면, 1669년(현종 10년) 동래부사 정석이 세운 후 1700년(숙종 26년) 부사 김덕기가 다시 지었고, 1726년(영조 2년)에는 부사 이중협이 고쳐 세웠습니다. 이때 천주헌은 14칸이고, 마굿간이 4칸으로 충신당 서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1870년경 정현덕 부사가 찬주헌을 새로 세웠으나, 일제강점이 충신당 앞 도로를 현재와 같이 건설할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래구는 2013년에 건물터를 확보하고, 설계에 들어가 2014년 3월에 찬주헌을 다시 지었습니다

 

(좌) 동래부 동헌 찬주헌 낮 (우) 동래부 동헌 찬주헌 야경

아래 영상은 달빛 품은 동래부 동헌을 촬영한 영상입니다.

 

 

지금까지 부산 동래 야경 핫플레이스 달빛 품은 동래부 동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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