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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에피소드(4) - 동래부사 송상현의 생애

여행/ㄴ Landmark에 얽힌 에피소드

by MasterHwan[마스터환] 2014. 1. 1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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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에 관한 에피소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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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원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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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 한배하의 젓가락 설화
동래부 객사터
박권농의 아들 설화
태평원 시비
동래부사 이안눌의 임진왜란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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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에피소드(4) - 동래부사 송상현의 생애

 

1551 ~ 1592년 조선 중기의 문신, 여산 송씨 집안에 태어났고, 호는 천곡이다 어려서 유교 경전과 역사에 능통하여 15세에 승보시에 장원하고, 1576년 문과시험에 합격하여 1591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동래부사로 부임한 후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읍성의 방비를 굳게 하고 백성듷에게도 선정을 베풀었다. 1592년 임진년 왜군 선봉대 18,700여 명이 난을 일으켜 4월 14일 부산진성을 빼앗고 동래읍성 난문 밖까지 와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고 쓴 나무 팻말을 세웠다.

 

그러자 그는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고 쓴 팻말을 적들에게 던지며 끝까지 싸울 뜻을 보였다. 적군은 성을 3겹으로 포위하고 이틑날 아침 크게 공격하였다.

 

송상현은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빼앗길 때 조복을 갑옷 위에 입고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부모님께 남기는 마지막 시를 다음과 같이 부채에 썼다.

"외로운 성에 달무리지고, 주변의 진(군부대)들은 베개를 높게 하여 잠들었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무거우니 부모와 자식의 은혜는 가볍습니다." 이윽고 적군은 그가 황복 하지 않을 것을 알고 죽였다.

 

적군 장수는 그의 충절에 감탄하여 그를 죽인 병사에게 상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죽였고, 송상현 부사를 동문 밖에 잘 묻어 주었다. 그 후 송상현은 이조판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동해 충렬사(안락서원), 개성 숭절사, 청주 신향서원, 고부 정충사 등에서 제사가 지내졌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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